(3) 자신이 갖고있는 직업과 은사와 재능으로 선교 합니다

세상속에 나가 고기를 잘 잡게하는 각자 가지고 있는 성도들의 그물이 바로 자신의 직업입니다. 자신의 재능과 은사입니다. 이 그물이 지금 다 찢어져 있든지 아니면 좋은 그물들이 안방 장롱속에 다 모셔져 있고 쓰여지지를 않고 있습니다. PGM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녹이 슨 연장과 찢어진 그물과 잘 모셔 놓아두고 있는 장비들을 끄집어 내어서 삶의 현장에서 쓸수있도록 도전하고 무장시켜 주는 선교기관입니다. 선교는 이제 전문인이 해야합니다.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전문성을 가진 전문인 선교사로 교회안과 밖에서 선교적인 삶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다 다 전문인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인’(Professionals)이란 한면에는 자신의 전공분야에 깊이가 있고 또 다른 한면에는 그 깊이가 있는 일을 지속성을 가지고 계속 한다는 의미입니다. 의사와 간호사 교수 등은 전문인입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깊은 지식이 있습니다. 또한 그런 전문인은 하루 이틀 그일을 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죽을때까지 그일을 합니다. 그래서 깊이와 지속성이 곧 평범한 사람을 전문인으로 만들어 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 인들은 모두가 다 ‘복음의 전문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전문인 선교의 의미는 먼저 ‘복음의 전문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음입니다(롬 1:16-17).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깊이 압니다. 곧 비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완벽한 ‘복음의 전문인’입니다. 또한 지속성이 있어서 하루 이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평생 죽을때까지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아름다운 발’(사 52:7)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완벽하게 정의된 ‘복음의 전문인’입니다. 선교는 전문인이 합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PGM에서 말하는 전문인은 세속적인 의미의 전문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의사요 간호사요 교수요 박사라 할지라도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통하여 세상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PGM에서 정의하는 전문인은 그러므로 ‘복음의 전문인’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여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생의 목적이 아닌 하늘나라 천국의 영생의 삶을 증거하는 ‘복음의 전문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이런 전문인이 합니다.

둘째, 이 ‘복음의 전문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재능, 직업, 은사를 가정에서, 교회에서 깊이 있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함으로 세상에 나가서도 직업의 목적이 돈 버는데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재능과 직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소명으로 여기는 전문인입니다. 평범한 가정주부는 ‘밥 짓는 전문인’으로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속에 나가서 ‘긍휼사역 전문인 선교사’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찬양대에서 사역하는 그리스도인은 가정에서 교회와 직장과 사회속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는 ‘찬양전문 선교사’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다른 사람의 공부를 도와주고 살펴주고 하급생이나 후배들을 잘 이끌어주는 형으로 언니로 ‘멘토전문인 선교사’로 혹은 ‘학생전문인 선교사’로 혹은 ‘교사 전문인 선교사’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가진 직업, 재능, 은사를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는 소명의식으로 깊이있고 지속성 있게 선교사적인 삶을 어느곳에서나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시대의 디아스포라의 꿈입니다.


(2) 성(sacred)과 속(secular)의 일원화가 되어야 합니다

21세기 선교는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때까지 선교는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안수 받으신 분들이 감당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즉 주의 일은 모두 주의 종들인 목사님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평신도 성도들은 목회자를 돕는 것으로만, 즉 일방적인 통행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목회자를 돕는다는 생각위에 이제는 목회자가 성도들을 도와서 성도 각자가 세상속에서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갈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강조되어서 균형이 잡혀야 교회도 성도도 건강하게 됩니다. 교회안과 교회밖에서의 삶의 균형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몇가지의 패러다임 변화가 요구됩니다.

첫째, 성(sacred)과 속(secular)의 이원론적인 신학적인 분류가 오류임을 분명하게 깨우치고 일원화 하여야 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하는일들이 거룩한 일이기에 목회자를 도와서 교회를 잘 세우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교회에서 충성 헌신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목회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일해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교회의 건물을 더욱 더 크게 지으며 교회를 강하게 세우는 것이 목회의 성공이라고 패러다밈을 세워 왔습니다. 교회 본질의 회복을 위하여 애쓰는 어느 분은 이런 현상을 ‘콩나물 시루’이 비유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여서든지 시루속에 있는 콩들이 자라고 양이 많아져서 시루를 빽빽하게 채우기 위하여 물을 계속 줍니다. 준 물을 또 퍼서 줍니다. 계속해서 물을 주어 시루 가득히 채운 목회자는 목회에 성공하신 훌륭하신 분이고 성공적인 목회자의 대명사로 불려왔습니다. 시루가 빽빽하게 찬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진대 문제는 그 시루속에서 자란 콩들은 시루를 떠나는 순간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시루 밖에 나가면 그냥 죽어버리고 맙니다. 교회 안에서만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 성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시루밖에 있는 콩들이 속된 것은 아닙니다. 시루속에 있는 콩은 시루 밖에 나가서도 어디에 뿌려지든지 생명력을 가지고 뿌리를 내리고 튼튼히 잘 자라야 합니다. 시루안과 시루밖이 구별되어서는 않됩니다. 성과 속의 이원론적인 가르침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능력과 맛을 잃어버린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둘째, 그러므로 교회에서 목회자는 성도들의 도움만 받아서 시루안을 튼튼히 하는것과 함께 성도들을 도와서 이제는 시루 밖에 나가서도 빛으로 소금으로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세상속에서 사는 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선교는 목회자를 도와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는 지체들인 성도들과 성도들을 세상 밖으로 나가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수 있도록 무장시켜주고 고기 잡을수 있도록 그물을 수선하여 주고 무장시켜 주는 목회자가 만날 때 성과속이 일원화 되는 선교적인 교회, 교회적인 세상을 이루어 갈것입니다.

목회자는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4:11). 선물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목회자를 교회에 주신 귀한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또한 선물은 받는이에게 기쁨을 줍니다. 목회자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어야지 근심을 주어서는 않됩니다. 기쁨을 주는 목회자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 것’(엡 4:12)입니다. 이때 온전케 한다는 의미가 ‘찢어진 그물을 꿰매어 준다’라는 뜻입니다. 즉, 세상 속에 나가서 고기를 잡을수 있도록 저들의 전문성을 잘 살려서 무장시켜 세상속으로 내어 보내는 목회자가 교회에 기쁨을 주는 선물입니다. 이제는 교회안과 교회밖을 이원화하여 보는 전통적인 패러다임에서 교회안에서 잘 수선되어 교회밖에 나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물로 고기를 잘 잡게하는 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품는 디아스포라의 꿈입니다.

(1) 그리스도인 각자는 모두가 전문성이 있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왜 선교가 지역교회 중심으로 이루어 져야 하며 또한 왜 전문인 선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교회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몸의 일부분인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롬 12:1-8, 고전 12:1-31, 엡 4:1-12).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엡 2:23).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엡 1:22, 4:15, 5:23).

많은 지체가 있는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시면 그 외의 모든 지체는 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몸의 한 부분인 ‘지체’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모두가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손, 귀, 팔, 손가락, 발가락, 오장육부, 머리털 등 모든 지체의 특징은 ‘전문성’입니다. ‘전문성’이 있는 지체가 합력하여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교회의 지체가 된 모든 성도는 내가 깨닫건 못 깨닫건 모두가 전문성이 있습니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꼭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목사도 평신도도 모두가 머리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로서 전문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목사와 성도들은 계급중심의 구성원이 아닌 전문성을 가진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급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기능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인 것입니다. 한 지체만 없어도 한 가지 기능을 못합니다. 그러면 몸 전체가 아프거나 힘들어 집니다.

셋째, 그러므로 선교는 공동체를 이루는 전문성을 가진 지체로서 팀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지체 혼자는 절대로 몸을 이루지 못합니다. 여러 지체가 합력하여야 합니다. 교회개척은 혼자 못합니다. 함께 하여야 합니다. 그레고리 교황이 영국에 선교단을 파송할 때 설교자만 보낸 것이 아니라 목수, 교사, 철공, 설계사, 주방장 등 40여명을 팀으로 보냈던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독불장군으로 주님의 몸이 절대 세워지지 않습니다. 전문인들이 모여서 지체의 기능을 다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팀사역이 이 시대에 실천되어야 합니다.

넷째, 교회안에서 지체로서의 전문성을 가지고 사역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속에서도 같은 은사와 같은 전문성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전문성의 연속성’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안에서 잘 하는 그리스도인은 교회 밖에서도 그렇게 잘 하여야 합니다. 이 시대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안에서는 잘 하는데 교회 밖에서는 영 아닌 것은 바로 이 ‘연속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에 일터에서, 직장에서, 선교사적인 삶을 잘 살자고 하는 분들이 교회안에 들어와서는 또 겉도는 현상도 봅니다. 둘다 ‘전문성의 연속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교회안과 교회밖에서의 선교사적인 삶은 전문성을 가진 지체들이 ‘상호보완성’을 가질 때 극대화 됩니다. 즉 교회안에서 잘하던 것을 교회밖으로 가서 응용하여 더 잘하고 교회밖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잘 하던 것을 교회안에 들어와서도 잘 하여야 합니다. 직장에서 출근시간 잘 지키는 분들은 교회에서도 정확하게 예배시간 및 모든 시간들을 잘 지키도록 도전받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선교는 교회안에서 훈련되고 양육받은 지체로서의 전문성을 가지고 세상속에서도 연속적으로 더 잘 적용하여 나감으로 전문성이 있는 전문인 선교사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디아스포라의 꿈입니다.

(5) 예배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PGM은 ‘선교의 제 4물결’로서 전통적인 선교의 장점과 귀중함을 토대로 21세기 이 시대에 요구되는 ‘새부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여 오고 있습니다. 이 칼럼을 통하여 PGM의 4대 핵심가치를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이 칼럼을 통하여 이미 나누어 온 첫번째 핵심가치는 ‘전통적 선교에서 디아스포라 선교로’입니다. 둘째는, 멀리가는 선교에서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즉 ‘Here and Now’선교입니다. 셋째는 선교단체 중심선교에서 지역교회 중심 선교입니다. 지역교회 중심선교의 핵심가치 중에 오늘 그 5번째로 왜 선교가 지역교회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는 선교는 예배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생각할 때 선교하면 일하는 것입니다. 어디가서 먼저 병자를 고치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교회세우고 하는 사역을 먼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핵심을 ‘하나님의 행위’로서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인간들에게 만군의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진실과 ‘모든 무릎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앞에 꿇어져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10-11)고 성경이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성부 성자 성령님이 오늘도 우리속에 선교 하시는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앞에 예배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자는 일하기 전에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첫 선교사로서 고향땅을 떠나 처음으로 정착한 곳에서부터 ‘처음으로 단을 쌓고 아브람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4) 고 기록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아브라함이 한 행위는 사람에게 나가서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드렸던 것입니다. 선교자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하는 자는 일하기 전에 먼저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불교계에는 스님이 2종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수도에만 전념하는 스님들을 불교계에서는 ‘이판승’이라고 한답니다. 열심히 행정하고 일하고 하는 스님들을 ‘사판승’이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수도하여야 할 스님들이 수도는 하지 않고 일만하면 앞장서서 각목들고 나가는 분들이 대개 ‘사판승’이라고 들었습니다. 이판이 사판되면 이판사판으로 끝장이 납니다. 즉 수도하고 진리를 추구하여야 할 분들이 일에 완전히 몰두하느라고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면, 이판이 사판되면 진리도 없어지고 질서도 무너져 내립니다.

현대 기독교 개신교 교회가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이유중의 하나도 이판이 사판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여야 할 목사님들이나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와는 관심이 없고 교회가 늘상 무슨 일하는것에만 온통 정신 다 팔리면 교회도 이판사판 됩니다. 교회의 제일 중요한 사명은 일하기전에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그 음성대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시험당하고 문제가 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배자로 살지 못하고 일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선교자는 먼저 일하기 전에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가 지역교회 중심의 선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지역교회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들을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PGM을 통하여 오늘의 디아스포라가 꾸는 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이 사역을 위한 것이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부르심이라면 제 2 차적인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들에’부르심 입니다(오스 기니스: 소명 p. 52). 이것은 좀더 깊은 의미의 ‘제자도’라고 오스 기니스 는 표현합니다. 이것은 제 1차적인 사명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교회 안에서 영적인 계급주의를 낳게한 구교도(캐톨릭)의 실수를 만회할수 있는 것이고 또 이 2차적인 사명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제 1차적인 사명인 하나님을 향한 부르심을 약화시킨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잘못과 실수를 잘 회복할수 있는 길이라고 오스 기니스는 주장합니다.

오스 기니스의 주장을 제가 간단히 정리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교인 카톨릭이 너무 잘한 것은 제 1차적인 사명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름받은 사람은 먼저 하나님께 불림을 받았기에 하나님앞에 나오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점만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은혜받고 사명 받으면 신학교에 가야 합니다. 사제나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평생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으로 교회나 수도원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야 하나님의 부르십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제 1차적인 부르심 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교회안에서 하는 사역이 영적인 것이 되고 세상속에서 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안에서는 기도도 많이하고 예배도 잘 드리는데 사업하는 현장에서는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이 예가 됩니다. 즉, 성과 속을 나누게되는 단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개신교가 잘한 것은 구교의 잘못된 교회 안에서의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만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성과 속의 차이를 타파하려고 한것입니다. 사람이 교회 안에서만 예배만 드린다고 거룩한 것이 아니고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롬 12:1-2),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교회 밖에서, 삶의 현장에서 계속하여 나가는 제 2차적인 사명을 강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모든 곳에서, 모든 걸들에’부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도 이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캐톨릭이 아주 잘한 제 1차적인 사명에 관한 것을 약회시키기 시작하였고 오직 삶의 현장에서 잘하려고 함으로 제 1차적인 사명을 약화시켰습니다. 오늘날 일터선교를 강조하는 사람가운데 교회의 예배나 기도생활을 무시하는 것들이 예가 됩니다. 캐톨릭이나 개신교나 다 한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을 오늘을 사는 디앙스포라가 회복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심을 제 1차적으로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클레시아)는 먼저 ‘세상에서부터 불림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 잘 훈련받고 영성을 갖추고 교회안에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제 2차적인 사명, 즉 ‘세상속으로 들어가 빛으로 소금으로 살라’라는 두 번째 사명을 받아 세상속에서 믿진않는 사람에게서 부터도 존경을 받는 삶의 현장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1차적인 부르심과 2차적인 부르심에 균형을 잘 맞추어 신앙생활이 교회안에서만이 아닌 생활신앙으로 교회밖으로 이어지는 삶이 오늘을 사는 디아스포라의 ‘선교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의 꿈입니다.

선교를 생각할 때 마다 우리가 갖는 생각은 ‘내가 무엇을 할수 있는가?’라는 사역중심의 생각을 자주합니다. 특별히 PGM의 ‘선교는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here and now)의 개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내가 가진 은사와 내가 가진 직업과 내가 가진 기술과 모든 전체를 동원하여서 주님의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스 기니스(Os Guinnes: 중국에서 태어난 영국인 옥스퍼드대락 사회학 박사. 유명 변증가 현재 트리니티 포럼 선임연구원)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제 2차적인 부르심이라고 정의됩니다.

오스 기니스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제 1차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부르심’(오스 기니스의 소명. P.53)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일수록, 사역중심(task oriented person)의 사람일수록 주의하여 들어야 할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부르심은 세상속에 나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아가 2:10) 고 자기에게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때에도 함께 가자고 부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숨어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창 3:9) 부르시면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스 기니스는 이 일차적인 부르심은 소명(calling)으로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이요 세상속에 나가 행하는 모든 소명들(callings)을 행하기 전에 제일 먼저 행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 1차적인 소명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저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속에 나가 무슨 사역을 하기 전에, 복음을 전하고 선교에 참여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부름받은 사람들이 보일 행함은 예배입니다. 마르다는 일 중심의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예배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즉 마르다는 제 2차적인 사명을 우선시 했고 마리아는 제 1차적인 사명을 우선시 했습니다. 둘다 중요한 것이지만 순서가 너무 중요합니다. 사역하고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1차적인 소명에 반응하여야 합니다. 마르다는 예배드리지 않고 일만하다가 화를 내고 마리아를 일 않한다고 정죄하고 나중에는 예수님에게도 명령을 하는 사람으로 추락합니다. 교회에서도 시험에 아주 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에는 열심하나 제 1차 소명인 하나님을 향한 에배자가 되지 못할 때 은혜없이 일을 합니다. 그리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추락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먼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오늘의 용어로 예배드린 것입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합니다. 우리를 부르심은 1차적으로 하나님께로 부르셨습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시작하여야 할 것은 사역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배로 응답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은혜충만하여 2차적인 부르심인 삶의 현장에서 사역도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살고자 하는 것이 오늘의 디아스포라의 꿈입니다.

PGM이 주장하는 핵심가치중에 PGM의 상징어가 된 것이 바로 선교의 현장성, 즉 선교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here and now)입니다. 즉 선교의 현장성입니다. 이 시대의 선교는 전통적인 서구적 선교의 패러다임인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즉 ‘미국에서 아프리카로’가 아닙니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이 선교지입니다. 필라델피아가 나의 선교지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영국 런던이 바로 선교의 현장이 됩니다. 내가 살고있는 홍콩이 두바이가 바로 선교지입니다. 바로 그곳에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여 사는 수많은 족속이 함께 모여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고향땅을 떠나서 남의 나라 땅에, 문화와 언어가 다른곳에 흩어져와 살고있는 모든 디아스포라들에게는 공통점이 적어도 3가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가 바로 여기서부터 선교할수 있는 ‘틈새’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PGM은 이 틈새를 파고들어가는 ‘틈새전략’으로 선교합니다. 이 3가지의 특성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주변성(Marginality)입니다. 사회학자 에버렛 스톤키스트(Everette Stonequist)는 그의 유명한 저서 ‘주변인간’(Marginal Man)에서 고향을 떠나 다른 문화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주류사회의 변두리에서 서성거리게 되어있다고 정의합니다. 한국에서 온 이민자 뿐만이 아닙니다. 전세계 곳곳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사람들은 모두가 이 ‘주변성’을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는 중간성(liminality)입니다. 이 단어는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가 한 말입니다. 그의 용어인 리미날러티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보면 디아스포라의 특징은 ‘중간성’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보면 한국사람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영원히 미국사람도 아닌 것 같은 중간에 끼어있는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미국으로 온 모든 흩어져온 디아스포라가 겪는 현상입니다. 마지막으로 혼란성’confusionality’이라고 제가 영어도 한번 만들어 봅니다. 혹은 당황성(frusstration)입니다. 흩어져 살아가는 모든 디아스포라들이 심겨진 새로운 문화권에서 체험하는 삶의 현장성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선교의 기회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나의 이웃이나, 코소보에서, 중동지역에서 혹은 남미 지역에서 흩어져 온 모든 디아스포라들은 이 미국땅이라는 곳에서 심각한 주변성, 중간성과 혼란성을 가지고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들이 살고있었던 고국이 모슬렘국가이어서 우리는 신체적으로 들어갈수도 없었고 들어간다 할지라도 저들의 정신세계까지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였지만 나의 이웃이 된 그들에게는 틈새가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어떤 종교나 사상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도 모두가 혼란속에서 새로운 자유를 갈구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주변성, 중간성, 혼란성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자유를 갈구하게 됩니다. 이 자유를 갈구하는 저들에게 자유롭게 하는 복음이 흘러들어갈수 있는 틈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크게 다가옵니다. 선교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할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변을, 이웃을 돌아봅시다. 복음을 전할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널려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디아스포라의 꿈입니다.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윌리암 캐리의 작은 책이 선교의 역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글의 힘’입니다. 서울대학교의 김난도 교수의 베스트 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에서도 젊은이를 향한 교수의 충고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비젼이 공유되는 것은 글의 힘이 막강한것입니다. 윌리엄 캐리의 작은 책의 이름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해 수단을 사용해야 할 의무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수단’이 바로 선교를 위한 단체의 설립이었습니다. 영어권 세계 전체에 요원의 불길같은 막강한 영향력을 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는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지만 윌리암캐리의 작은책이 개신교 선교의 대헌장이 되었다고 랄프 윈터는 주장합니다(미션 퍼스펙티브 p. 220).

캐리의 친구들에 의하여 선교단체가 조직되고 캐리를 인도에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런던에 두 번째 단체가 조직됩니다. 스콧틀랜드로 네델란드로 확산되어 나갑니다. 미국에서는 5명의 대학생이 함께 건초더미 위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충만을 받고 미국해외 선교위원회를 발족 시키게 됩니다. 학생선교운동이 캠퍼스부터 에서 시작이 됩니다. 캐리가 인도로 선교사로 떠난후 25년 사이에 미국과 유럽에 12개의 선교단체가 설립됩니다. 그후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면서 선교는 선교단체가 한다는 이해가 될 때까지 아름다운 도구로 쓰임받아왔습니다.

선교단체는 하나님이 쓰시는 아름다운 도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선교단체는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디아스포라 선교의 관점에서, 그러나 한가지 꼭 실행되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단체가 선교를 주도하는 시대에서 지역교회가 선교를 주도하는 시대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선교에 관심있는 사람이 지역교회를 떠나 선교단체로 가고 지역교회의 헌금과 자원을 일방적으로 선교단체로 보냈습니다. 선교단체가 운영이 되기 위하여 선교단체도 재정적인 지원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교의 방향이 이제는 선교단체가 지역교회를 깨우고 돕고 각성시키고 무장시켜주는 진정한 para church로서의 기능을 해야합니다. 지역교회에서 선교단체로의 일방통행이 아닌 선교단체는 지역교회를 도와 지역교회들이 선교를 감당할수 있는 선교적인 교회로 변화받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지역교회는 선교단체가 전문적인 선교의 전략과 전술을 잘 개발할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이제는 발전하여 나가야 할때입니다. 특별히 디아스포라 교회는 교회자체가 선교적입니다. 다문화, 다언어 등으로 이미 선교에 가장 적합한 도구가 되어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교회가 흩어져 있는 곳에서부터 성육신적인 선교를 잘 감당할수 있도록 선교단체가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전문인 선교회(PGM)도 디아스포라 선교의 전략과 전술을 개발시켜나가면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한인디아스포라 교회들이 ‘선교적인 교회’(Missional church) 되도록 돕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것입니다. 지역교회에서 선교단체로 가야 선교할수 있었던 방향이 아닌 이제는 선교단체가 지역교회를 도와 지역교회가 선교할수있게 하는 관계가 이 시대 디아스포라의 꿈입니다.

선교가 교회밖의 선교단체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것에는 대략 3가지의 이유가 있었다고 저는 봅니다. 첫째는 지역교회가 선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역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확실히 깨닫지를 못하고 ‘강권하여 내집을 채우라’(눅 14:23) 는 근시안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있을 때 옛날이나 지금이나 선교는 선교단체 중심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둘째, 선교의 불을 가슴에 담은 사람들을 교회가 소화해 내지 못함으로 그들은 교회 밖에서 모여 주님의 지상명령을 순종하려 힘쓴 이유도 있습니다. 한국에 선교단체인 ccc나 ywam 같은 선교 단체들이 흥왕할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는 교회가 저들이 주장하는 성경적인 부르심을 수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단이 생긴 많은 이유중의 하나가 지역교회가 성경적인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을 때 열심히 믿어 보려는 사람들이 교회밖으로 나가서 자신들 끼리 모여 자신들의 주장하는 일부분의 진리를 세워나가면서 생기기 시작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셋째, 교회가 선교에 대한 정보나 구체적인 ‘왜? 선교하여야 하나’혹은 ‘어떻게 선교하여야 하나’하는 주제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성령은 누구신가’ ‘무엇이 죄인가?’하는 소위 명제적인 가르침과 설교에 너무 많이 치중하여 균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르침이고 교회가 전파하여야 할 사명이지만 ‘그래서 어떻게 살란 말이냐?’하는 실질적인 삶에 적용하는 면들이 너무 약하였던 것들이 오늘 이 시대에도 교회가 세상속에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하여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여 주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도날드 맥가브란을 중심으로 피터 와그너에 이르기까지 6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교회성장’의 바람이 한국교계를 강타하였고 그 교회성장의 비결중의 하나로 선교가 어느날 부터인가 강단에서 외쳐지고 교회의 구호에 사용되고 배너의 가장 중요한 단골 메뉴가 되어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선교가 교회존재의 본질적인 이슈로 각성되기 전에 한국교회는 불행하게도 선교는 교회성장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수단으로 심지어 액세사리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솔직히 많은 교회를 다녀 보면서 종이 보고 느끼고 깨달은 사실은 지금도 수많은 한인교회들, 특별히 디아스포라 교회들도 사람을 늘리기 위한, 즉 성장을 위하여서 선교를 해야한다고 믿는 교역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수가 없는 현실을 보고 비통함을 누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선교단체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선교는 교회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부수적인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선교는 교회가 존재하는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에게 주신 이 절대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은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이기에 예수님은 마지막 유언으로 이 말씀을 주님의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막 28:18-20) (마 16:15/눅 24:46-48/요 20:21/행 1:8)

지역교회를 통하여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땅끝까지 보내어 주님이 가르치신 것을 주님오실 때 까지 감당하는 지역교회를 통한 선교가 오늘 이 시대의 디아스포라의 꿈입니다.

선교의 영원한 모델을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교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삶의 모법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보좌 영광 버리시고 이땅에 내려 오셔서 인간과 함께 사셨습니다. 함께 식사하시고 여행하시고 고민하시고 우시고 갈등하시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으시고 끝까지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 어떻게 이기고 승리하면 살아갈수 있는지를 몸소 매일의 삶의 현장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을 저는 ‘성육신의 선교’(incarnational mission)이라고 부릅니다.

일년에 한 두주간 휴가를 내어서 멀리 정글속에 살고 있는 원주민을 찾아가서 선교하는 것은 엄청나게 귀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선교는 멀리도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가서 2주간 혹은 3주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삽니다. 2,3주가 선교의 프로젝트는 될지 몰라도 진정한 삶을 나누는 것은 되지 못합니다. 2,3주 동안 저들을 위하여 화장실도 지어주고 우물도 파주고 질병도 고쳐주고 전기도 끌어다 놔주고 하는일이 얼마나 값이 있고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계속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선교의 배후에는 ‘우월감’과 ‘높은데서 낮은데로’흐르는 교만함과 저들을 가르치려는 ‘고집’과 내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하고 왔다는 ‘나의 의로움’(self-righteousness)가 들어오는 틈이 너무 많은 것을 체험합니다. 가장 영향력있는 선교는 그들에게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자고 똑같은 삶의 수준과 형편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선교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정말 존경스러운 경이의 대상입니다. 그 분들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 ‘성육신의 선교’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가정과 자녀와 직장을 다 버려두고 포기하고 자녀들 데리고 원주민들의 삶속에 들어가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흉내도 낼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는 가능합니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문화코드를 가지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삶의 질을 나누고 살아가는 매일 매일 일상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거짓없이 꾸밈없이 나의 사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며 살아갈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디아스포라의 ‘바로 여기에서부터’의 ‘성육신 적인 선교의 삶’입니다. 옥스퍼드 신학대학원 학장인 마 원석 박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면 ‘기독교의 선교는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는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의 선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위치한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마 원석 박사는 자신의 가족중의 유일한 기독신자였던 어머니의 결혼과 가정안에서 아버지와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한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통치에 순종한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의 성육신의 선교의 모델임을 주장합니다(PGM 선교신학포럼, p. 64). 가정안에서, 직장과 공동체 안에서 삶을 통하여 주님의 통치권을 드러내는 성육신의 선교, 이것이 오늘 우리 디아스포라의 꿈입니다.